성경공부와 큐티

발람의 접촉점에 믿음을 잃은 선민들(민25:1-18)

되어지는대로 2025. 5. 19. 05:46

발람의 계략에 믿음을 잃은 선민들(25:1-18)

 

  모압 왕이 주술사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다. 영적 세계의 힘을 빌려 그 기세를 꺾으려 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 개입으로 막으셨다. 발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선민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게 할 계략을 만들었다. 왕에게 전하고 복채를 받아 돌아갔을 것이다. 왕은 여인들을 이용해 선민들을 이방의 축제에 초대했다. 바알브올의 사건이다. 선민들이 이방 여인들과 먹고 마시며 음란한 축제를 즐겼다. 우상의 제사에 참여했다. 그들에게 주의 진노가 임했다. 재앙이 닥쳤다.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가 이방 여인과 동침하는 자를 죽일 때까지 24000명이 죽었다. 선민이지만 자기 죄로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 이미 40년을 믿음의 언약을 맺고 순종의 훈련을 받았다. 그런 믿음이 왜 그리 쉽게 무너졌을까?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처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2:14).”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약속의 땅으로 행진했다. 모압 평야에서 이방인들과 만났다. 그들은 풍요와 다산을 준다는 바알 신을 섬기며 살고 있다. 주술사 발람이 이스라엘을 유혹할 동질감, 곧 마음의 접촉점을 찾아냈다. 육신의 풍요와 번영과 기쁨이다. 믿음이 연약한 선민들을 축제에 초대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찾아와, 우리 모두 만족과 기쁨, 즉 행복한 삶을 위해 신을 믿지 않느냐며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자고 유혹한 것이다. 선민들은 매일 속죄의 상번제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러나 세상 친화적인 육체의 욕망, 원초적 죄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음의 본성적 완악함, 육성을 억누르며 살 뿐이다. 모압 평지에서 불과 몇 달을 지내며 그들은 육체의 유혹에 넘어갔다. 십계명의 언약을 잊었다. 언약을 잊고 우상의 축제에 참여했다. 타락한 세상 문화에 동화된 것이다. 오늘의 신자들도 그런 접촉점을 좋아하는 것 같다. 풍요와 번영, 재미, 축제와 같은 삶 등 세상이 좋아하는 접촉점으로 전도를 시도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접촉점은 발람이 교회를 무너뜨릴 때 사용한 것과 같은 육체의 관심거리다. 또 인류 평화, 박애, 평등 등 목적과 신념이 같다며 종교 다원주의, 동성애 등 인본주의 신앙을 지향하는 종교인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주님과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속죄와 영생의 구원을 위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드리며 사랑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타락한 세상과 사라질 육체에 소망을 두지 않았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아버지의 뜻, 곧 성령을 따라 말하고 행하며 살았다. 전도의 접촉점은 세상의 사상과 문화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 신앙의 참된 접촉점은 바울의 고백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삶의 현장에서 생활화하며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주님처럼 모든 말과 행동이 내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것이어야 한다. 성도의 그런 삶이 접촉점이 되어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전도가 아닌가? 발람의 교훈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그 은혜를 증언하는 성도의 삶이기를 오늘도 소원한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거룩은 최고의 극상의 완전한 좋음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영생의 자녀들이 추구하며 기뻐하는 이름입니다. 오늘도 그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며 삶의 현장에 아버지의 주권이 임하고 하늘에서 세우신 뜻이 우리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합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아버지를 등지는 악에서 구하소서. 하늘의 사랑과 기쁨에 우리도 참여하게 하소서. 사랑하시며 기뻐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