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선민을 해칠 어떤 마법도 점술도 없다(민23:13-25)

되어지는대로 2025. 5. 16. 06:00

선민을 해칠 어떤 마법도 점술도 없다(23:13-25)

 

   모압 왕과 발람이 선민들을 저주하려 했다.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장소에서 또 제물을 바친다. 발람의 입에 말씀을 넣어주셨다. 저주가 아니리 축복의 말씀이다. “그분은 야곱에게서 허물을 보지 않고 이스라엘에게서 잘못을 보지 않으셨다.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들 가운데 있다. 그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들소의 뿔과 같다. 야곱을 해칠 마법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칠 점술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주신 축복과 세상이 선민에게 주는 저주를 생각한다.

 

  왕과 발람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에도 자기들의 소원을 포기하지 않았다. 장소를 옮겨서 정성을 다해 다시 제물을 바쳤다. 하나님은 그들의 저주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발람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했다. 세상 누구도 선민을 저주하며 실제로 해칠 수 없다. 그러나 후에 이스라엘은 재앙을 당한다. 원수의 저주로 망하지 않았다. 스스로 망하는 길을 택했다. 하나님을 배반하며 언약을 저버린 것이다. 신약 시대 많은 사도와 성도들, 곧 선민들이 박해와 고통을 당했다. 돌에 맞거나 십자가로 죽고 화형을 당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저주받은 인생이다. 그러나 하늘의 관점에서는 복된 인생이다. 그렇듯 성경의 축복과 저주는 세상의 기준과 다르다. 땅에서 풍요와 번영을 누리는 삶은 사실은 축복도 저주도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과 뜻 아래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죄와 저주에 갇힌 현실을 모르는 자가 세상에서 부를 누리며 안주하고 있다면 그는 선민이 아니다. 그가 누리는 세상의 복은 천국의 관점에서는 저주다. 지옥으로 향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주님과 관계없이 세상에서 형통한 삶이라면 그는 선민이 아니며 저주 속에 있는 것이다. 가난과 역경 속에 살더라도 마음이 주님 안에서 하늘의 하나님께 오르고 있다면 그는 하늘의 절대 평강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것이 참된 복이며, 저주는 모압 왕과 발람처럼 생명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이미 그들은 저주 속에 있는 것이다. 주님은 땅에서 죽임을 당했다. 원수의 저주와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에는 원수가 없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한 사랑만이 있다. 그러므로 살인자를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다. 오늘 우리도 그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영생의 나라와 참된 복을 알게 되었다. 과연 지금 내게는 어떤 소원이 있는가? 창조주이며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며 기뻐하는가? 십자가의 주님께 마음을 드렸다면 세상의 무엇이 아까우며 미련을 품겠는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민들, 그 자녀들을 누가 해칠 수 있겠는가? 오늘도 오직 하늘 아버지의 이름이 마음에 거룩히 여겨지며, 그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세상의 어떤 이름도 아버지의 거룩하신 이름에 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이름과 관계들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한 뜻이 있기에 있게 하신 것들입니다. 그 뜻을 이루는 도구이며 재료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성도의 마음 안에 들어오면 배설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오늘도 자녀들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십자가 복음, 그 축복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주님은 세상에 없는 평강과 기쁨으로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그 믿음과 소망으로 모든 시험과 장애를 이기며 우리 마음도 하늘에 오르게 하소서. 지상의 몸으로는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며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하소서. 그 영광을 찬양하며 받은 은혜를 나누게 하소서. 존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