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요3:11-26)
욥이 아픈 심정을 토로한다. “왜 비참한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고 고통스러운 영혼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죽음을 기다리는 자가 죽음이 오지 않아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보다 간절히 죽음을 찾다가 마침내 무덤에 이르게 되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지 않겠는가?... 내게 평안도 쉼도 조용함도 없고 그저 고난만 와있구나.”
슬픈 고백이다.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낫고, 태어났으면 빨리 죽는 것이 좋겠다며 탄식한다. 자신이 죽음을 맞으면 세상의 왕과 부자들도 부럽지 않으며, 낙테된 아기처럼 쉼을 만날 것이라 한다. 그는 죽음을 동경하고 있다. 죽음만이 그에게 평안과 기쁨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더 이상 삶의 기대도 소망도 없다. 이제 소원은 죽음뿐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마음 상태가 하나님을 만나는 마지막 단계의 믿음이 아닐까? 세상에 대해 어떤 소원과 바램도 없이 오직 죽음만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세상에 대해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바울의 고백이 그런 것이 아닐까? 바울이 욥과 다른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대해 살아 있어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하늘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이 있었다. 세상의 가치, 돈과 명성, 건강, 장수 등에 대한 기대와 욕구가 더 이상 없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욥과 같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에는 참 평안과 기쁨, 만족이 있었다. 하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어떤 믿음인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면, 세상을 잃고 소외되는 고난과 죽음이 정말 괴롭고 싫을 것이다. 욥은 죽음을 원하고 있다. 이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면 그도 바울과 스테반처럼, 변화산의 베드로처럼 참 기쁨과 만족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하나님과 그 나라를 소원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아닌가? 과연 오늘 나는 주님이 주시는 믿음과 소망 안에서 육신의 삶도, 죽음도 담담히 바라보고 있는가? 감사와 기쁨으로 나를 향하신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의식하며 이루고 있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만물과 역사의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무한한 지혜와 사랑으로 지키시며 영광의 세계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육신의 고통과 죽음 너머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를 바라봅니다. 죄와 사망의 길을 택한 조상으로부터의 유전적 죄의 체질을 죽이고 영생과 진리의 자녀로 부르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땅에서 시선을 돌려 하늘 아버지를 생각하며 천국 자녀의 온전하고 정직한 믿음으로 살아내기 원합니다. 담대한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세상과 육체의 시험을 이기게 하소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십자가의 주님을 따라 하늘 영광의 길을 걷게 하소서.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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