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참 예배자가 드러나다(마26:6-16)

되어지는대로 2023. 4. 3. 06:19

참 예배자가 드러나다(26:6-16)

 

   본문은 예배의 원리를 제시하는 것 같다. 비교를 통해 참 예배자를 드러낸다. 한 여인이 예수께 값비싼 향유를 부었다. 제자들이 비난한다. “왜 향유를 저렇게 낭비하는가?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예수가 말씀하신다. “왜 이 여인을 괴롭히는가? 이 여인은 내게 좋은 일을 했다.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도 전해질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기 위해 대제사장을 찾아간다. 여인과 제자들 모두 하나님과 예수를 믿는 예배자들이다. 과연 누가 참 예배자일까?

 

   체포되기 이틀 전이다. 이미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예고하셨다. 여인은 소중한 향유를 죽을 예수를 위해 부어드렸다. 제자들은 놀라며 분개한다. 그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자를 위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향유가 아까운 것이다. 이런 생각은 실용적이며 합리적이다. 사람들을 위한 진보적인 이론이다. 세상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세상을 위해 혹은 자기를 위해 아깝다고 생각하며, 옳다고 판단하는 목적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더 적극적이다. 죽을 예수를 아예 버린다. 이제는 자기 인생에 도움이 안 될, 죽을 예수를 돈을 받고 팔아버린다. 그러나 예수는 그 여인이 예배를 드렸다고 말씀하신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녀가 한 일도 전해질 것이라 하신다. 그녀가 한 일은 가장 아까워하는 것을 예수께 드린 것이다. 이것이 예배의 원리가 아닐까? 예배의 이론들은 공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러나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원리는, 내게 가장 아까운 것을 죽을 예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나도 세상에 대해서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한다. 여전히 아까운 것이 마음에 있다면 아무리 충성 봉사하며 예배 의례에 참석해도 참 예배자는 아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거룩히 여길 수도, 기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들까지도 나를 위해 아끼지 않았으니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 그러므로 참 예배자는 전통과 관습을 따라 정해진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 생활의 현장과 사건들 속에서 주님을 위해 아까울 것이 전혀 없는 삶의 태도로 드러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죽음에 동참하는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런 삶이 주가 원하시는 참 예배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참 예배자일까? 아까운 것이 생길 때마다 나는 바울의 고백처럼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죽는가? 여전히 예배당의 분리된 시간과 장소에 예배를, 믿음을 가두어 놓고, 세상에서는 내 뜻, 내 마음대로 살지 않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진실로 그 이름이 우리 가운데 가장 거룩하고 소중하며 사랑하는 이름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나라와 주권이 우리 삶의 모든 현장에서 드러나며 하늘에서 세우신 그 뜻이 우리 삶의 모든 여정에서도 성취되며, 그런 삶을 위해 오늘 일용할 양식과 건강을, 필요한 지혜와 능력, 용기를 더하여 주시고 그 뜻에 빗나가며 손해를 끼치는 죄를 사하여 주소서. 세상과 육신의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아버지를 거역하는 죄악에서 구하옵소서. 모든 주권과 영광이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시고 버림받고, 죽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