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과 군중심리...(행19:23-41)
에베소에 소동이 났다. 은세공업자 데메드리오가 시작했다. 그는 아데미 여신상과 신전의 모형을 만들며 돈을 번다. 바울은 사람이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로 인해 신상들이 팔리지 않았다. 분노한 세공업자들이 그를 비방하며 선동했다. 신전과 아데미 여신은 그들 에베소의 자랑이며 위대하다고 외쳤다. 큰 소동을 벌어졌다. 바울이 나서려 했으나 지인들이 그를 피신시켰다. 연극장에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현명한 관리에 의해서 그 집회는 해산된다. 군중심리와 믿음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선동에 잘 넘어간다. 군중심리에 휩쓸리면 이성도 양심도 잊는다. 악행도 거리끼지 않는다. 자기를 합리화한다. 이 심리의 본질은 다수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아닐까? 목소리가 큰 사람을 믿고 따라간다. 마음이 육신에 종속된 상태로 부패한 세상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생각하고 느끼며 판단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다. 홀로 자신의 완전한 나라를 세울 수 없다. 남의 생각과 판단에 의지한다.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세상에 숨으려 한다. 부화뇌동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늘에 계신 주의 소리를 듣는다. 성령의 음성과 감동을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다수의 음성, 돈과 권세, 명성 등 세상의 가치보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군중 속에 있는 나보다 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죄와 사망의 저주에 갇혀 있다. 그런 토양에서 죄는 독버섯처럼 퍼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밥그릇의 위기를 느낀 그들의 선동에 바울과 에베소 교회가 위기를 맞는다. 이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난다. 세상의 악한 선동과 소란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태초의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의 본성 때문이다. 히틀러의 학살을 비롯한 악행들은 그 유전자가 발현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지 않으셨는가? 세상과 육신에 매인 내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림을 받는 것이 영생의 구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르는 구원 여정의 시작이다. 오늘도 군중에 속한 내가 아니라 스스로 계신 유일하신 분 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홀로 설 수 있는 나를 소원한다.
만유의 주 하나님, 특별히 사람을 지으시고 자유 의지를 주시며 기쁨의 동산에 두신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천국의 온전한 자녀로 세우기 위해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비록 죄를 짓고 에덴을 잃었지만 주의 사랑과 지혜, 그 능력은 언약의 말씀과 인자의 몸으로 오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증명되었습니다. 오늘도 악한 시험에 들지 않으며, 죄에서 구하시는 은혜를 구합니다. 미혹에 휘둘리는 연약한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을 탈출하는 길을 여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평강과 기쁨을 맛보게 하소서. 영생과 진리의 자녀로서 홀로 설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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