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 생활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곧 유일한 기도의 대상이신 주 하나님을 이렇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시작하라 하셨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 쏟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너희는 속으로는 세상을 사랑하는 위선의 마음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 이방인들의 태도로 기도하지 말고, 오직 골방에 들어가듯 은밀히 유일한 나와 너의 관계로, 곧 단독자로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나는 죄와 타락에 젖은 몸으로 저주받은 땅에 있다. 그러므로 하늘로 내 마음이 올라가야 한다. 하나님을 땅으로, 내 곁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렇게 동원되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부패한 마음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다. 청결한 마음만이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음이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과 내가 우리가 된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나도 자녀로 받아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이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 땅에 있는 우리 마음도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를 따라 십자가의 죽음에서 시작해 부활과 승천, 보좌 우편의 자리까지 오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면한다. 그러므로 기도의 시작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한다.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성도들은 그 죽음이 나를 위한 것이며 세상에 대한 죽음인 것을 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셨다. 제자들도 당신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기를 원하셨다. 그들도 당신과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며 하늘 아버지와 아들 예수의 그 영원한 사랑과 기쁨에 동참하기를 바라셨다. 그러므로 기도는 세상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나도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세상에 대해 어떤 것도 마음에 두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그렇게 원하던 로마제국으로부터 나라의 독립과 번영, 사회 정의, 성공과 출세, 형통한 삶 등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고 소통을 시작한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그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여전히 세상과 육신에 붙어있는 상태로는 기도를 할 수 없다, 먼저 세상에서 마음이 떠나야 한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세상에 대해 이미 죽은 자인데 어떻게 여전히 세상과 육신을 향해 집착과 소원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말씀하신 대로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그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그렇게 땅과 육신에 묶인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닿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기도는 먼저 십자가의 그리스도께 온 마음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죄와 타락에 찌든 자기를 부인하며 청결한 마음을 회복하고 부활과 승천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떠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직면하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와 아들 예수의 영원한 사랑과 기쁨에 연합하며 세상을 떠난 그 마음이 하늘의 아버지와 그 나라, 곧 천국을 체험하는 것이다.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그 생각과 판단, 그 선하신 뜻에 접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익숙한 세상의 일과 관계를, 내 생각과 판단, 내 나라를 부인하며 세상과 육신에서 떠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세상과 육신을 떠나지 않는 마음은 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소통은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는 먼저 그 마음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는 것을 소원하며 이어져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 마음에 거룩히 여겨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세상에 있는 많은 이름 중 하나라도 아까워하며 마음에 두고 있다면 하늘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기뻐하는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이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나님과 천국을 소망하는 마음만이 하늘에 닿고 구원에 이르며 그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며 선하신 그 뜻을 온전히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아침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무수히 반복하며 우리 마음도 십자가의 주님 안에서 하늘의 아버지, 그 영원한 사랑과 기쁨에 동참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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