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고 있는 책의 첫 부분을 요약해 올려봅니다)
주기도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체계(「주기도 생활화」 태승철지음 24년 7월 출판)
기도는 사람과 신의 언어적 소통이다. 그러나 피조물인 사람이 거룩한 영이신 창조주와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온 생각이 말씀이며 언어다. 속에 있는 말씀이 생각이다. 사용하는 언어와 의미의 체계가 서로 다르면 인격적인 관계와 소통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성경에서 지적한 대로 이미 저주받은 땅에서 죽음을 선고받은 죄인 상태인 사람이 어떻게 거룩하신 창조주와 의미 있는 소통을 한단 말인가?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아신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 들어도 이해할 수 없다. 땅에서 사람들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가치 기준은 창조주 하나님의 기준과 전혀 다르다. 저주받은 땅에서 타락한 사람들이 갈망하며 원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도 중요한 것도 아니다. 마음이 하늘에 연결된 사도 바울은 땅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지 않았는가? 장수하는 것보다 오히려 빨리 세상을 떠나 주님 곁에 올라가기를 원하지 않았던가?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미혹을 받고 그의 언어와 의미체계를 선택했다. 영이신 하나님을 떠나 마음이 육체에 붙어버렸다. 쓰는 언어와 의미, 개념이 달라졌다. 그러므로 소통이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소원을 알아도 그것이 진짜 좋고 옳은 것이 아니므로 용납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선민 이스라엘을 택해서 율법과 성전과 제사를 주셨다. 선지자들을 통해 믿음의 길을 가르치셨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을 계시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의 방향을 하늘로 돌리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 말씀과 공생애, 그리스도의 십자가 연쇄 과정, 그리고 주의 기도를 통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소통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하늘에 닿을 수 있는 이 기도는 오직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드려지신 어린 양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 자리에서만 드려질 수 있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 안의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며 주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정결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떠나 부패한 세상의 자리에서 드리는 죄인의 기도는 거룩하신 주께서 수용하실 수 없다. 그런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자기 것으로 여기는 자들이 드리는 주의 기도가 바로 온전한 믿음의 자녀들이 하늘의 아버지께 드릴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의 기도는 그저 종교의식을 수행하며 주문처럼 암송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일상의 현장에서 매일 십자가의 도를 생활화하는 사람이 주기도의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쉬지 않고 기도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여기며 하늘의 언어와 의미, 그 가치체계에 가까이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성도는 십자가의 생활화와 주기도의 생활화를 통해 그 마음이 주님과 함께 별세와 부활의 길을 따라 하늘에 오르고 하늘 아버지와의 진정한 소통과 관계 속에서 참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남은 삶을 그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해서 살아갈 것이다.
잘못된 두 가지 기도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 말씀하시며 두 가지 잘못된 기도를 금지하셨다. 이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주의 기도를 가르치셨다.
먼저 금지하신 기도는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의 마음으로 드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자기를 드러내며 기도하기를 즐겼다. 돈과 권세, 명성 등 세상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치를 사랑하며 추구했다. 하나님의 이름과 율법은 그런 세상의 가치를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도구로 동원할 뿐이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마음은 세상에 있게 된 존재들을 더 사랑하며 기뻐했다. 실제 그들의 마음에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흐르지 않는다. 마음을 지불하지 않은 것이다. 마음의 중심에는 세상에 있게 된 존재들이 영광(조명)을 받고 거룩히 여겨진다. 세상을 향해서 마음을 다 쏟고 있었다. 그런 위선적 마음과 태도로는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너희는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스스로 계신 유일하신 주 하나님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세상은 알 수 없는 은밀한 상을 주실 것이라 하셨다. 그는 하늘에서 오는 참 평강과 기쁨을 체험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도 많은 종교인들처럼 피조된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며 그런 이름들을 마음에 거룩히 여기며 살지 않는가? 과연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의 지성소에 모시고 그 이름을 가장 사랑하며 소중히, 거룩히 여기는 믿음의 자녀들로 살고 있는가?
두 번째 금지하신 기도는 이방인의 마음으로 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도 하늘을 향해 기도한다. 자기 문제의 해결과 소원을 위해 간구한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올인하며 따르는 너희들은 주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관계하는 천국의 자녀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이신 새로운 영적 상황으로 입양된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신다. 더구나 그 아버지는 전지전능하며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런데 왜 아버지가 없는 고아들처럼, 이방인들처럼 세상의 염려와 육신의 필요를 위해 중언부언의 기도를 반복하는가? 하늘의 아버지는 이미 자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장래의 모든 것을 생각하며 지금도 보고 계시며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며 미래를 향한 완벽하며 창조적인 계획과 뜻을 품고 계신다. 너희가 계속 육신의 자기를 고집하며 거부하고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하늘에서 세우신 그 뜻이 땅에서도 성취되며 그 선하심과 주권, 그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 것이다.
우리는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런 자녀의 믿음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오히려 선악과를 취하고 받은 저주받은 땅의 익숙한 생각과 느낌으로 스스로 세상의 선악을 판단하며 자기 뜻과 계획들을 세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기 주권과 주체성, 책임감을 내세우며 마음과 뜻과 힘을 쏟고 살아간다, 순간순간 보이고 들리는 세상과 육신의 요구에 흔들리며 부패한 세상, 타락한 육신의 습관과 기억을 따라 마치 이방인들처럼 하늘의 도움을 청한다. 삶의 현장과 문제 앞에서 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과 십자가 생활화를 간과하거나 잊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하늘 아버지의 자녀 됨을 놓치고 땅의 자녀로 추락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살면서 자기 뜻을 고집하며 기도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신자들의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시고 하늘의 아버지께 닿을 수 있는 주의 기도를 가르치셨다. 다음부터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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