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사밧은 왜 아합과 결탁했을까(왕상22:41-53)
여호사밧은 정직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책망받을 일도 있다. 악한 왕 아합과 결탁한 것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아들을 결혼시켰다. 후에 아달랴는 여호사밧의 가문을 끊어버리려 했다. 아합과 함께 전쟁에 나섰다가 간신히 돌아왔다. 아합의 아들과는 무역선으로 돈을 벌려 했다. 그 배는 파선했다. 그의 실패를 생각한다.
그는 히스기야, 요시야와 함께 좋은 평가를 받는 왕이다. 남창을 없애고 종교개혁을 했다. 산당을 없애지는 않았다.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에서 우상에게 제사했다. 아합의 집과 혼인동맹을 맺었다. 정치적 목적이었을 것이다. 함께 무역선을 만들어 경제적 이익도 추구했다. 그러나 그 동맹은 유익이 없었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책망을 들었다(대하20장). 그의 믿음은 신앙의 영역에만 실현되었던 것 같다. 정치, 경제 등 다른 영역에서는 세상의 방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용적이며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예배당 중심의 종교 생활을 넘어 삶의 모든 현장에서도 적용되고 드러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살아계시며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예배당에서는 열심히 살아계신 주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는 마치 주 하나님이 없다는 듯이, 혹은 자기와 상관이 없다는 듯 세상의 상식과 가치, 곧 자기중심적 생각과 판단을 따라 살지 않는가? 아마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며 그 존재와 관계에 관한 느낌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대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를 사랑한다면, 믿음으로 얻는 그 존재감과 그 주권의 현실감을 놓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세상과 육신에 매여있는 자녀의 마음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데려가기 위해 인자의 몸으로 오셨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길을 따르라 하셨다. 그 십자가를 늘 의식하며 생활화할 때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성령을 그 길에서 만날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기쁨을, 영적 세계의 실존과 그 영광을 체감할 것이다. 그 교제와 교통이 깊어지며 마음은 참 평강과 기쁨을 누리고 몸으로는 그 뜻을 이루며 땅에서부터 천국을 살 것이다. 오늘도 마음의 눈을 들어 아버지가 계신 하늘을 바라보며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그 은혜의 길에 오를 수 있기를 소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녀 삼으시는 아버지의 이름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지요. 그 이름이 마음에 거룩히 여겨지며 그 나라가 임하며 그 주권과 다스리심이 모든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고, 그 뜻이 삶의 여정 가운데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그런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고, 우리가 서로의 죄를 사하는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 세상의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며 다만 아버지를 떠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에서 구원하소서.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우리를 혼돈과 죽음의 땅에서 낙원으로 이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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