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주시려는 자유를 거부하는 사람들(갈5:1-12)

되어지는대로 2024. 10. 28. 06:29

주시려는 자유를 거부하는 사람들(5:1-1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이르는 십자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죄와 저주의 땅, 곧 세상에 갇혀있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유를 거부한다. 이유를 생각한다.

 

   주께서 주시려는 자유를, 곧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 자유는 그들이 보기에는 자유가 아니다. 구약에서 복으로 여기는, 곧 땅에서 육신의 영광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주 하나님,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 사랑하고 기뻐하며 그 뜻을 이루는 자유였다. 더구나 그 자유는 자아의 죽음, 곧 세상에 대한 자기 주체성의 죽음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선과 악, 좋고 나쁨 등을 스스로 판단하고 주체적으로 추구하는 삶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늘의 관점에서 그것은 사탄의 미혹에 걸린 채 부패한 세상과 육신에 갇힌 종으로 사는 것이다. 죄와 죽음의 저주, 심판의 길을 가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 후 타락한 인류는 그런 삶이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세상 편향성, 육체 의존성의 죽음을 위해 십자가 연쇄 과정을 몸소 감당하셨다. 그 십자가에 마음을 드리며 연합하는 자는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 아버지께 대해 거듭난다. 세상의 지식, 행위원칙 등의 매임에서 풀려난다. 자신의 판단과 주체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율법과 원칙이 아니라 그때그때 하나님의 주체성이신 성령님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 그는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 두려움 등에서도 자유롭다. 오직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비로소 그는 율법의 근본 취지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전히 실현하며 살 수 있다.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연결된 그는 율법의 의무가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해도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태초에 창조주께서 기쁨의 동산 에덴을 살도록 계획하신 본래 사람의 삶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저주받은 땅에는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시험이 남아있다. 욥처럼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며 이겨야 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선하심과 주권을 늘 의식하며 의의 소망을 붙들어야 한다.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믿는 십자가 복음이 아닌가? 그 십자가를 늘 의식에서 놓치지 말아야 십자가 효과, 곧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자유와 행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오늘도 그 십자가 길을 따라 세상과 육신의 매임에서 자유를 얻고 하늘의 평강과 기쁨에 이르며, 몸은 성령을 따라 그 뜻을 이룰 수 있기를 소원한다.

 

   사랑하시는 주 하나님, 사랑은 자유로운 상태로 마음을 드리며 기쁨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자기를 고집하면 주의 사랑을 받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주시려는 영생과 진리의 복이 구원이고 자유이며 사랑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라 하신 말씀이 하늘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기쁨에의 초대인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그 십자가와 주기도의 생활화로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의 날이 되기 원합니다. 성령으로 이끄소서. 그 나라와 의, 그 영광을 소망하며 찬양하게 하소서.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