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로 오신 주님(눅2:1-14)
로마 황제가 인구조사를 명했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지 베들레헴으로 간다. 그곳에서 예수를 출산하고 구유에 뉘였다. 여관에 그들이 들어갈 빈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구유에 오셨다. 존귀하신 분이 동물의 여물통에 누우셨다. 그곳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을까? 기쁜 소식이 한밤중에 들판의 목자들에게 전해졌다. 변방에 천사들의 찬양이 울려퍼졌다.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들도 그 목자들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사를 먼저 받고 싶으셨을까?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성자 하나님이 땅에 오신다. 피조물인 인간, 그것도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당연히 땅에서 가장 거룩한 곳에 오셔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땅의 존귀한 자인 황제의 궁궐도, 경건하다는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의 집도 아니다. 평범한 가정집도 아니다. 외양간의 구유에 착륙하셨다. 그곳이 그나마 땅에서 거룩한 곳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어떤 인간의 집도 거룩하신 주께는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당시 사회의 하층민인 목자들에게 복음이 먼저 전해지고, 그들의 일터에서 천사의 노래,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가 선포되었다.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변방에서 복음이 증거되었다. 하나님은 변두리에 있는 그들의 찬양을 원하신 것이 아닌가? 변방에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하나님 나라 도래의 첫 소식이 들린 곳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귀족들, 상류층의 잔치 자리가 아니었다. 이 시대 우리도 주를 만나기 위해서 세상의 변방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화려하고 우아한 성에서 탈출해 성 밖의 골고다로 가야 하지 않는가? 구유보다 못한 비천한 나에게 존귀하신 주님이 찾아오셨다. 구원의 회개를 요구하시며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이끄신다. 존귀하신, 그러나 겸손하신 주님을 오늘 나는 어떻게 맞이하며 따르고 있는가?
은혜의 주 하나님, 공의와 사랑, 긍휼의 말씀과 역사를 통해 비천한 자녀들을 구원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지혜와 사랑, 그 경륜의 역사로 우리를 돌이키시며 거룩한 자녀의 자리에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부패한 땅, 타락한 인생의 현실과 함께 하늘의 참된 거룩과 사랑을 배우며 주의 나라와 의를 바라보기 원합니다. 육신에 매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과 진리, 참된 영광을 깨우치며 하늘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도 이루게 하소서. 참된 회개와 겸손,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주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소서,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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