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관점, 두 길...(창9:18-29)
노아가 포도원을 지었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다. 자기 장막에서 벗고 잠들었다. 함이 그 벌거벗은 몸을 보고 형제들에게 말했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벗은 몸을 덮어 주었다. 노아가 그 일을 알았다.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고 셈과 야벳은 축복한다. 이 일로 민족의 복과 저주가 갈린다. 실수는 노아가 했다. 그러나 함의 자손들이 저주를 받는다. 무엇이 잘못일까?
새 인류의 길이 나뉜다. 셈과 야벳은 복된 길을 간다. 함은 저주의 길이다, 특히 가나안은 셈 족속들과 땅의 쟁탈전을 벌일 것이다(가나안은 함의 아들이며 또한 지역의 이름이다). 이렇게 만든 함의 잘못은 무엇일까? 사실 노아의 저주는 아버지로서, 할아버지로서 적절하지 않다. 아마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기에 그렇게 전하지 않았을까? 이 일로 상반된 두 인간관이 드러난다. 가나안은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과 습성을 수용한다. 약한 자를 비웃으며 자기는 정상이라고 믿는다. 죄인임을 모르며 자기 주체성과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셈은 자기가 죄인임을 안다. 다른 인간관으로 삶을 시작한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듯이 자신도 주와 동행하기를 원한다. 그는 아버지를 포함해서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함은 아버지의 실수에 실망했다. 노아는 하나님이 택하셨고 유일하게 홍수에서 살아남았다. 그를 살리신 하나님을 잊고 아버지의 실수에 놀라며 조롱하는 마음을 품었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남을 정죄했다. 하나님도 인정하신 인간관, 즉 인간이 어려서부터 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은 사건에서 복과 저주의 길, 즉 정죄하는 자와 감추어주는 자의 길이 갈리고 말았다. 오늘 나는 어떤 관점으로 살아는가? 사람이 어릴 때부터 죄인인 것을 깨닫고 있는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남의 행위를 비난한다면 나도 함의 길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의인은 없다. 모두 죄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불평과 정죄를 버리고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을 가며, 겸손히 하늘 아버지께 온 마음을 드리며 사랑하는 것이 자녀의 온전한 인생이 아닐까?
만물과 역사의 주 하나님, 사랑과 공의의 모든 판단은 오직 주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인류가 피조물인 본분을 잊고 자기 주체성을 주장하며 주가 보시기에 빗나간 길을 가고 있습니다. 주의 뜻을 어기고 주가 만드신 세상을 더럽히며 저주와 심판을 재촉합니다. 불쌍히 여기시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열어주시니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오늘도 은혜의 이 구원의 십자가 길에 동참하기 원합니다. 세상과 육체에 묶인 마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아버지의 마음에 이르게 하소서. 겸손히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늘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세상을 이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공부와 큐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약속과 요구사항(창121-9) (0) | 2022.08.22 |
---|---|
셈과 함, 야벳의 영적 구분(창10:1-32) (0) | 2022.08.19 |
무지개, 슬픈 언약(창9:1-17) (0) | 2022.08.17 |
홍수와 기다림...(창8;1-12) (0) | 2022.08.16 |
사람의 첫 번째 일...(창8:13-22) (0) | 2022.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