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믿음의 실상...(눅23:13-25)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살리려 한다. 사형에 합당한 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라고 외친다. 살인죄의 바라바를 풀어달라 한다. 군중의 소요를 염려한 총독은 결국 예수를 죽음에 넘겨준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들이다. 왜 그렇게 분별을 잊고 무죄한 예수를 죽이려 할까? 선민들의 왜곡된 믿음, 그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사실 그들의 분노와 증오는 하나님께 대한 것이 아닐까? 그들 마음에는 현실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또 불의한 지도자들의 수탈과 억압을 당하는 자기 처지에 대한 분노를 의미한다. 고통당하는 자신을 돕지 않는 하나님과 그 통치에 대한 원망과 다르지 않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메시야(그리스도)를 고대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다윗왕의 때처럼 번영의 나라로 회복시켜 줄 것을 소원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예수는 무력했다. 나라의 독립과 번영, 사회의 개혁과 개선에 대해서 그는 관심도 뜻도 없었다. 회개하고 복음을, 마음에 임한 천국을 믿으라 하지만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 비현실적이며 추상적으로 들린다. 그 마음이 물질의 복에 이끌리며 세상의 형통만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 부패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육체에 밀착된 마음은 예수의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과 천국을 향하지 않는다. 현재 보이는 세상과 육신의 욕구를 목표로 한다. 잘못된 과녁을 향하는 왜곡된 믿음이며, 자기 소원을 위해 신을 동원하는 세상의 종교일 뿐이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소원해야 할 선민들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보다 더 악한 욕망과 분노와 증오를 드러낸다. 이것이 왜곡된 믿음의 실상이 아닐까?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믿음은 심판과 저주의 용광로로 빨려 들어간다. 이 시대 우리는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교훈을 받고 있는가? 과연 오늘 나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천국을 그리워하며 소원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늘 의식하며 자기를 부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공의의 말씀을 오해한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자녀들을 오래 참으시며 말씀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으로 가르치시며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온 마음을 십자가의 주님께 드립니다. 성령으로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깨우치게 하소서, 부패한 땅에서 시선을 돌려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그 나라를 체험하며 하늘의 참된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남은 육신의 삶을 통해 이루게 하소서,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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