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성전에서 통곡하는 지도자...(스10:1-15)

되어지는대로 2022. 4. 21. 09:02

성전에서 통곡하는 지도자...(10:1-15)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통곡하며 기도한다. 많은 무리가 함께 울며 기도한다. 그들 중 하나가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충고를 따라 이방 여자들과 그 자녀들을 내보내기로 합시다. 율법에 따라 그렇게 합시다.” 그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을 소집해서 이방과 혼인한 가정들을 조사한다. 그 아내와 자녀들을 친정으로 보내기로 한다. 불법으로 맺어진 가정들을 해체한다. 에스라는 왜 그렇게 통곡을 하며 괴로워했을까?

 

  선민인 이스라엘의 가정은 세상과 달리 거룩해야 한다. 혼인은 아내가 속한 관계와 문화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가정은 세상의 부정과 더러움에 젖고 결국 하나님의 언약에서 떨어져 나간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연결이 끊어진다. 그 의미는 생명의 축복에 이르지 못하고 죄와 사망의 저주 가운데 남는 것이다. 그 혼인은 선민이 세속 문화와의 접속을 기뻐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에스라의 통곡은 하나님과 그 축복에서 이스라엘이 멀어진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고통의 기도를 드리신 것도 하나님과 끊어져서 저주 가운데 떨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육체를 근거로 맺은 관계를 잃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큰 재앙은 하나님, 곧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끊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영의 눈이 가려진 사람들은 모른다. 육체를 근거로 맺어진 가족, 혈연, 지연 등 땅의 관계가 가장 소중한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하여 세상에 대한 죽음을 고백하고 하늘의 영광을 본 신자들은 다르다. 부패한 세상의 있음과 좋음은 일시적이며, 하늘 아버지의 있으심과 좋으심이 유일하며 영원한 것을 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 아브라함처럼 육신의 아들도 바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오늘 우리의 믿음은 당연하게 보이는 세상의 관습과 상식들, 육체의 요구들을 이기고 있는가? 하늘 아버지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고통으로 느끼고 있는가? 나는 육신의 생각과 감정, 의지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생각과 뜻을 따라 가정과 직장 등 모든 관계에서 아버지께 받은 나의 역할과 소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있는가?

 

  거룩하신 주 하나님, 만물을 지으시고 구별된 피조물로 부르시며 거룩한 소명으로 이끄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생명과 진리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죄와 사망의 저주를 택한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의 역사를 베푸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천국 자녀의 길을 깨우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함으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 아버지께 대해서 살아있는 자녀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늘 아버지와 천국의 좋음과 아름다움을 보게 하소서, 모든 시험과 죄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