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문제는 정결이다(민19:11-22)

되어지는대로 2025. 5. 5. 06:03

문제는 정결이다(19:11-22)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그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잿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그러면 정결하거니와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그냥 부정하니...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회중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시체와 접촉해 부정한 자가 정결을 얻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반복하며 강조하시는 이유는 정결이 선민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선민의 삶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신 것이 부정과 정결함의 문제다. 먹고 사는 법, 가정과 직장, 나라를 위한 삶의 지침이나 윤리가 아니다. 처음 명하신 일도 성막을 세우며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 영적 의미를 생각한다.

 

  하나님은 선민을 당신의 거룩함에 맞춰진 거룩, 곧 영생의 가족으로 세우기 원하신다. 태초의 범죄 이후 인류는 에덴(기쁨)을 잃었다. 죄와 죽음의 저주에 갇혔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을 영적 인격체로 지으셨다. 그러나 죄에 젖은 육체로 전락했다. 하나님을 등지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육체를 따라 살아간다. 창조주로부터 끊어진 마음, 곧 영적으로 죽은 마음은 보이는 세상과 육체에 종속되었다. 혼돈과 공허, 흑암 속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시체는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이 끊어져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없는 상태, 곧 부정함을 상징한다. 부정한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접촉할 수 없다. 연합하며 동행할 수 없다. 영생과 진리의 구원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선민에게 하나님을 만나며 영생을 얻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마음의 정결이다. 그래야 마음이 하늘에 오르며 그 영원한 사랑과 기쁨에 접속할 수 있다. 정결하지 않으면, 곧 마음에 있어야 할 하나님 사랑이 없으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영생은 불가능하다. 속죄했어도 체질적 죄성으로 주의 뜻을 거스르는 악행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향한 율법과 성전, 제사를 통한 구원은 실패했다. 하나님께 맞춰질 수 있는 정결에 이르지 못했다. 마음을 다한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 새 언약, 곧 신약 시대 인자로 오신 주님이 말씀을 풀어주셨다. 마음이 하늘이 아니라 저주받은 땅과 육체를 향하는 부정한 체질이 먼저 죽어야 한다. 보이는 하나님으로 땅에 오신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연합해야 한다. 주님의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동일시하는 자는 부활의 주님 안에서 정결을 얻으며 구원의 기회를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삶의 현장에서 생활화한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른다. 하나님은 지금 살아계시며 사랑하시며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 십자가의 주님 안에서 정결을 얻고 마음이 하늘에 올라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나 과연 그 하늘 아버지와 영생의 나라가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하며 갈망하는 현실인가? 그 믿음과 소망, 사랑이 있다면 선민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떠나 육체로 사는 선민들이 너무 많지 않나? 오늘도 부정을 벗는 정결을 구하며 십자가의 주님께 온 마음을 드린다. 언제 어디서나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소원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은 가장 사랑하며 기뻐하는 극상의 대상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져야 함은 오직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며 마음을 다한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저주에 젖은 우리는 오직 십자가의 주님 안에서 정결의 기회를 얻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 믿음과 소망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 마음도 별세와 부활의 길로 이끄소서. 그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며, 그의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하소서.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